엔리코 단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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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엔리코 단돌로는 1107년경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베네치아의 저명한 단돌로 가문 출신이다. 그는 1171~1172년 베네치아-동로마 전쟁, 1183년과 1184년 콘스탄티노플 외교 협상에 참여했다. 1192년 베네치아의 도제가 되어 외국인 추방, 자라 공략, 통화 개혁 등을 시행했다. 1202년 제4차 십자군에 참여하여 십자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여 라틴 제국을 세우는 데 기여했으며, 1205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사망하여 하기아 소피아에 묻혔다. 그는 베네치아 역사상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십자군 원정으로 인한 비잔티움 문화 파괴에 대한 책임도 지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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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코 단돌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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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엔리코 단돌로는 1107년경 베네치아 공화국의 저명한 단돌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한 기록은 부친 비탈레가 사망한 1174년 이전까지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40]
단돌로가 정치 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1171년에서 1172년 사이 베네치아와 동로마 제국 간의 갈등이 고조되었을 때였다. 1171년 3월, 비잔틴 제국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가 제국 내 베네치아인들을 투옥하고 재산을 몰수하자,[41] 당시 도제 비탈레 2세 미키엘레는 단돌로를 포함한 보복 원정대를 조직했다.[42] 그러나 이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43] 이후 단돌로는 외교관으로서 활동하며, 1183년과 1184년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동로마 제국과의 배상금 협상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44][45]
1192년, 오리오 마스트로피에로 도제가 물러나자 단돌로는 40인 평의회의 선거를 통해 베네치아의 제41대 도제로 선출되었다.[46] 당시 그는 이미 고령이었고 시력도 거의 잃었지만, 강한 정신력과 야심을 가지고 정력적으로 활동했다.[47] 도제 즉위 후 그는 베네치아 내 외국인 거주에 관한 법령을 정비하고,[48] 베네치아에 적대적이던 자라를 공략했으며,[49] 베네치아의 통화 제도를 개혁하여 새로운 은화인 그로소를 발행했다. 이 그로소는 이후 지중해 무역의 주요 통화가 되었다.[50]
단돌로의 통치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제4차 십자군에 대한 개입이었다. 1202년, 이집트 원정을 목표로 결성된 십자군이 원정 비용을 마련하지 못하자, 단돌로는 부족한 자금을 지원하는 대신 십자군에게 베네치아의 경쟁 도시인 자라를 공격하도록 제안했다.[51]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53] 단돌로는 직접 십자군을 이끌고 1202년 11월 자라를 함락시켰다.[52] 이로 인해 베네치아 십자군은 파문당하기도 했다.[54]
자라 함락 직후, 단돌로는 동로마 제국의 폐위된 황제의 아들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의 제위 복위 요청을 받아들여 십자군의 목표를 콘스탄티노플로 변경했다.[55] 1203년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알렉시오스 4세와 그의 아버지 이삭 2세를 공동 황제로 복위시켰다. 그러나 이들이 약속한 보상금을 지불하기 전에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의 반란으로 살해당하자,[51] 단돌로는 1204년 십자군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을 다시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약탈했다. 이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라틴 제국이 세워졌다.[51] 단돌로는 초대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을 지지했다.[56] 대신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일부, 이오니아 해 연안, 크레타 섬 등 동로마 제국 영토의 상당 부분을 베네치아 영토로 확보하여 공화국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고 동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때 약탈한 네 마리의 청동 말상은 현재 산 마르코 대성당에 남아있다.[57]
엔리코 단돌로는 1205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사망하여 아야 소피아에 묻혔다.[58] 그의 무덤은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하기아 소피아를 모스크로 개조하는 과정에서 훼손되어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며, 현재 남아있는 묘비는 19세기에 설치된 것이다.[59] 그의 아들 라니에리는 부친의 뒤를 이어 도제가 되는 것을 거부했으나, 단돌로 가문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도제를 배출했다.
2. 1. 초기 생애와 정치 활동

엔리코 단돌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유력한 법률가 가문인 단돌로 가문 출신으로,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1107년경으로 추정된다. 아버지는 공작 궁정의 일원이자 법학자인 비탈레 단돌로였으며, 안드레아와 조반니 두 형제가 있었다. 그의 삼촌인 엔리코 단돌로는 그라도 총대주교였다. 아버지 비탈레가 1174년, 90대가 넘은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엔리코를 포함한 아들들은 완전히 자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젊은 시절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1][2]
단돌로가 처음으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맡은 것은 1171년과 1172년 사이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던 시기였다. 당시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가 베네치아의 경쟁 도시인 피사와 제노바인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다시 받아들이자, 이에 분노한 베네치아인들이 제노바 구역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3]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마누엘 1세는 1171년 3월, 제국 내 수천 명의 베네치아인을 투옥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3][41] 베네치아 공화국은 즉각 반발했고, 당시 도제 비탈레 2세 미키엘은 단돌로를 포함한 보복 원정대를 조직했다.[4][42] 그러나 이 원정은 1172년 역병이 돌면서 실패로 끝났고, 귀환한 미키엘은 패배에 분노한 베네치아 군중에게 살해당했다.[5][6][43] 또한 단돌로는 1172년 비잔티움과의 실패한 강화 협상에 공화국 사절단으로 참여하기도 했는데, 일설에 따르면 이때 시력을 잃었으며 비잔티움 제국에 깊은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63]
이후 단돌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외교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후임 도제 세바스티아노 지아니 시기에는 시칠리아의 굴리엘모 2세에게 두 차례나 베네치아 대사로 파견되는 등[7] 여러 외교 임무를 수행하며 베네치아의 이익을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비록 굴리엘모 2세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지속적인 외교 활동은 그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183년과 1184년에는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여 외교 협상을 벌였다. 1183년에는 형 조반니와 함께 방문하여 새로운 비잔티움 황제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와 베네치아인들의 피해에 대한 배상 문제를 논의했을 가능성이 크다.[8] 1184년에는 피에트로 지아니, 도메니코 산두도와 함께 다시 공작 사절로 파견되어 안드로니코스 1세와 협상을 벌였고, 마침내 투옥된 베네치아인들의 석방, 베네치아 구역의 복원, 그리고 배상금 지불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9][45]
1192년 (또는 1193년 1월 1일)[46], 전임 도제 오리오 마스트로피에로가 물러난 후, 단돌로는 40명으로 구성된 평의회의 선거를 통해 베네치아 공화국의 제41대 도제로 선출되었다.[46] 당시 그는 이미 고령이었고 시력도 거의 잃은 상태였으나, 놀라운 정신력과 야심을 가지고 정력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47]
2. 2. 도제 즉위와 베네치아 개혁

1192년 6월 1일, 오리오 마스트로피에로가 물러난 후 엔리코 단돌로는 베네치아의 새로운 도제가 되었다.[46] 그는 40명의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된 두 번째 도제였다. 당시 이미 나이가 많고 시력이 좋지 않았지만, 매우 야심차고 뛰어난 정신력과 활동력을 보여주었다.[47][10] 그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후대의 기록에 따르면 1107년경 태어나 도제 즉위 당시 85세였다고 한다. 그는 도제 서약(promissione ducale)을 한 첫 번째 도제는 아니었지만, 그의 서약서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도제가 된 단돌로는 여러 개혁을 추진했다. 1192년 8월 16일, 그는 베네치아에 거주한 지 2년 미만인 모든 외국인을 추방하는 법령을 발표했다.[11][48] 집주인들은 해당 외국인들을 내보내야 했고, 이를 어기면 50 리라의 벌금을 내야 했으며 외국인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또한 베네치아 시민들은 우마나 또는 라구사 출신을 제외한 외국인에게 15일 이상 돈을 빌려주는 것이 금지되었다.[12] 이 법령의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당시 베네치아로 외국인 유입이 늘어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2년 이상 거주한 외국인은 추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193년, 단돌로는 달마티아 해안에 위치하며 오랫동안 베네치아의 통제에 도전해 온 도시 자라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자라는 1180년까지 베네치아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반란을 일으켜 독립한 상태였다.[49] 단돌로는 이전부터 자라에 대한 베네치아의 지배권 회복을 지지했으며, 1187년 오리오 마스트로피에로의 자라 탈환 시도에도 자금을 지원한 바 있다. 1193년의 공격은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어, 이전에 잃었던 파고, 오세로, 아르베 섬의 통제권을 되찾았다. 하지만 자라 자체를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다.
1194년에는 베네치아의 통화 시스템에 중요한 개혁을 단행했다.[50] 당시 베네치아의 주요 동전이었던 은화는 가치가 하락하고 있었고, 예루살렘 및 비잔틴 동전의 가치 변동성도 문제였다. 이에 단돌로는 세 종류의 새로운 동전을 도입했다: ''비안코''(반 페니), ''콰르타롤로''(1/4 페니), 그리고 은화인 ''그로소''이다.[14] ''비안코''는 은 함량이 약 5%였고, ''콰르타롤로''는 귀금속 함량이 거의 없는 토큰 코인으로, 고대 로마 이후 유럽 최초의 토큰 코인이었다. 특히 ''그로소''는 5세기 이상 서유럽에서 주조된 최초의 거의 순수한 은화이자 고액권 동전이었다.[15] 그로소 한 면에는 단돌로 자신과 성 마르코가, 다른 면에는 왕좌에 앉은 예수 그리스도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비잔틴의 ''아스프론 트라키'' 동전 디자인을 따른 것이었다. 이 ''그로소''는 이후 지중해 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통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2. 3. 제4차 십자군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
1202년 빌라르두앵의 조프루아를 비롯한 제4차 십자군 기사들이 베네치아를 방문하여 원정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당시 베네치아 총독이었던 엔리코 단돌로는 이 기회를 베네치아의 이익 증진에 활용하고자, 십자군에게 베네치아 선단과 군대를 제공하기로 했다.[16] 협상 조건은 기사 1명과 말 1마리당 은화 4마르크, 그 외 병사 1명당 은화 2마르크를 지불하고, 베네치아는 최대 1년간 수송과 물자를 제공하며, 베네치아군도 50척의 무장 갤리선과 함께 참전하되 프랑스 십자군이 전리품을 나누기로 하는 것이었다.[18] 단돌로는 이 합의를 성유물에 맹세하며 지킬 것을 약속했다.[19]원래 십자군의 목표는 성지 이슬람 세력의 배후인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였으나, 베네치아는 이집트와의 무역 관계를 중시했다.[51] 그러나 예상 인원의 3분의 1만 도착한 십자군은 약속된 수송비 85,000마르크를 마련하지 못했고, 모든 비용을 긁어모아도 34,000마르크가 부족했다.[21][20] 많은 베네치아 상인들이 이 대금에 의존하고 있어 재정적 위기에 처하자,[21] 단돌로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는 부족한 금액을 베네치아 국가가 대신 빌려주는 대신, 과거 베네치아의 무역 기지였으나 헝가리 왕국에 넘어간 자라를 탈환해 줄 것을 제안했다.[22][51] 이는 자라의 해적 행위로 인한 무역 방해를 제거하고 베네치아의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목적도 있었다.[22]
1202년 10월, 십자군 함대는 베네치아를 떠났다. 단돌로는 산 마르코 광장에서 열린 의식에서 직접 "십자가를 짊어지고" 십자군에 합류하여 "살든지 죽든지 함께하겠다"고 선언했다.[23] 11월, 함대는 자라에 도착했고, 단돌로는 시민들에게 즉시 항복하거나 죽음을 맞으라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24][52] 당시 헝가리 왕 임레는 이미 기독교인이었고 십자가를 짊어진 상태였기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같은 기독교도를 공격하는 것을 금지하며 이를 어길 시 파문하겠다고 경고했다.[24][53] 그러나 십자군은 11월 24일 자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25][52] 교황은 베네치아인들을 포함한 십자군 전체를 파문했지만,[24][54] 단돌로는 베네치아 병사들이 이 사실을 알면 이탈할 것을 우려하여 이를 숨겼다. 프랑스 십자군은 사절을 보내 용서를 구했지만, 정교분리를 중시한 베네치아는 파문에 개의치 않았다.
자라 함락 직후, 비잔티움 제국의 폐위된 황제 이사키우스 앙겔루스의 아들 알렉시오스 앙겔루스가 망명 황태자 신분으로 자라에 도착했다. 그는 삼촌 알렉시우스 3세 앙겔로스에게 빼앗긴 제위를 되찾기 위해 십자군의 도움을 요청하며, 복위에 성공하면 막대한 보상금과 십자군 원정 지원을 약속했다.[26][55] 단돌로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십자군 지도자들을 설득했고, 십자군의 목표는 다시 한번 변경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게 되었다.
1203년 6월, 십자군과 베네치아 연합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여 공성전을 시작했다. 난공불락으로 알려진 도시였기에 공략은 쉽지 않았다. 이때 고령에 눈까지 멀었던 단돌로는 직접 상륙 작전을 지휘하며 산마르코 깃발(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징)을 성벽에 꽂는 용맹함을 보였다. 십자군은 알렉시오스 3세를 몰아내고 이사키우스 2세와 알렉시오스 4세를 공동 황제로 복위시켰다.

그러나 이사키우스 부자는 약속한 보상금을 지불하기 전에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의 반란으로 살해당했다.[51] 새로 황제가 된 알렉시오스 5세가 보상금 지급을 거부하자, 단돌로와 십자군은 1204년 4월 12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다시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도시를 철저히 약탈했다. 이 과정에서 알렉시오스 5세는 살해되었고, 동로마 제국은 사실상 멸망했으며 그 자리에 라틴 제국이 세워졌다.[51] 단돌로는 약탈 과정에서 수많은 귀중품을 베네치아로 보냈는데,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 산 마르코 대성당을 장식하고 있는 네 마리의 청동 말상이다.[57]
라틴 제국의 초대 황제로 단돌로를 추대하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을 지지하여 그가 황제가 되었다.[56] 대신 단돌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영토의 약 절반, 이오니아 해 연안, 크레타 섬 등을 베네치아 영토로 확보하여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높이고 동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하는 실리를 챙겼다.
엔리코 단돌로는 1205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으며, 아야 소피아에 묻혔다.[58] 현재 남아있는 묘비는 19세기에 복원된 것이며,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하기아 소피아를 모스크로 개조하면서 원래의 묘는 훼손되어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59]
2. 4. 라틴 제국 수립과 죽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십자군은 알렉시우스 4세가 반란으로 쫓겨나자 1205년 초, 엔리코 단돌로의 선동으로 다시 한번 도시를 공격했다. 이때 십자군은 대규모 학살, 파괴, 약탈을 자행하고 라틴 제국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단돌로는 베네치아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집중했고, 그 결과 베네치아는 비잔티움 제국 영토의 8분의 3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베네치아는 십자군과 정복한 땅을 거래하여 크레타와 같은 중요한 무역 기지를 확보했다.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단돌로는 제국의 혼란이 베네치아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빠른 안정 회복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를 위해 새로운 라틴 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것이 시급했다. 단돌로 역시 황제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자신이 황제가 될 경우 공화국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거절했다.[27] 대신 그는 동료 베네치아인들을 설득하여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 1세 대신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1세가 황제가 되도록 지원했다.[27] 황제 자리는 거절했지만, 단돌로는 데스포테스 칭호는 수락했다.[28]
이 정복의 결과로 ''로마니아 분할'' (Partitio terrarum imperii Romaniae|로마니아 분할la)이 이루어졌으며, 제국 함락 전 십자군이 맺은 협정에 따라 베네치아는 비잔틴 제국의 8분의 3에 해당하는 영토를 할당받았다.[29] 여기에는 항구 근처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일부, 마르마라해 연안 일부, 아드리아노플 시 등이 포함되었으며, 이전 비잔틴 영토의 다른 부분들도 포함되었다.[30] 단돌로는 또한 "로마 제국의 8분의 3의 영주"라는 칭호를 얻었으나, 이 영토들은 1261년 라틴 제국이 붕괴될 때까지 유지되었다.[31]
단돌로는 1205년 5월 또는 6월에 사망하여[32][33]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 (성 소피아 대성당)에 묻혔다. 19세기에 이탈리아 복원 팀이 묘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 근처에 가묘 표식을 설치했으며, 이 표식은 오늘날에도 남아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를 실제 단돌로의 중세 묘비로 오해하곤 한다. 실제 무덤은 비잔틴 제국이 도시를 되찾았을 때나,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후 하기아 소피아가 모스크로 개조될 당시에 파괴되었다는 여러 전설이 전해진다.[32][34]
그러나 2021년 터키 공영 방송 TRT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는 이러한 전설과 다른 증거를 제시했다. TRT가 실시한 지표 투과 레이더 탐사 결과, 가묘 표식 아래 약 50cm 깊이에서 머리가 예루살렘을 향한 채 앉은 자세의 사람 해골이 발견되었다. 이 해골의 키와 자세 등 특정 특징들이 단돌로의 것과 일치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35]
3. 실명
단돌로가 언제, 어떻게 실명했는지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 노브고로드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1171년에서 1172년 사이 비잔티움 제국 원정 중 비잔틴인들에게 실명당했다. 당시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가 "그의 눈을 유리로 멀게 하라"고 명령했으며, 이로 인해 그의 눈 자체는 다치지 않았지만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60]
한편, 토마스 F. 매든의 연구에 따르면 단돌로는 1174년에서 1176년 사이에 받은 머리 뒤쪽의 심한 타격으로 인해 피질 시각 장애를 겪었다.[61] 이는 단돌로의 서명 변화에 근거하는데, 1174년에는 그의 서명이 완전히 읽을 수 있었지만 1176년에는 종이 전체에 걸쳐 휘갈겨 썼으며, 이는 그의 시력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악화되었음을 시사한다는 것이다.[61]
단돌로의 실명은 완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돌로와 함께 제4차 십자군에 동행했던 제프리 드 빌아르두앵은 "그의 눈은 정상적으로 보였지만, 머리 부상을 입은 후 시력을 잃어 얼굴 앞에서 손을 볼 수 없었다"라고 썼다.[62] 이 1차 증거는 단돌로의 눈이 손상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실명이 피질 시각 장애였다는 매든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4. 유산과 평가
베네치아에서는 공화제 정신에 따라 엔리코 단돌로를 기리는 기념물을 세우지 않았으며, 그의 무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에 있다.[64]
단돌로의 아들 라니에리는 아버지가 부재 중일 때 부(副) 도제를 역임했으며, 나중에 제노바 공화국과의 크레타 섬 지배권을 둘러싼 전쟁에서 사망했다. 라니에리의 딸 안나 단돌로는 1217년 세르비아의 국왕 스테판 네마니치(재위 1196–1228)와 결혼하여, 엔리코 단돌로는 이후 네마니치 왕조의 여러 군주의 조상이 되었다.
도제 재임 기간 동안 단돌로는 콘테사라는 여성과 결혼했는데, 1183년 정치적 임무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떠나기 전 그녀에게 상업 및 개인적인 업무에 대한 권한을 위임했다.[37] 콘테사의 가문에 대해서는 미노토 가문 출신이라는 추측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4. 1. 긍정적 평가
엔리코 단돌로는 베네치아의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놀라운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중세 베네치아를 빛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지만,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이미 80대의 고령이었고 시력까지 잃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십자군을 이끌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큰 도시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는 위업을 달성했으며, ''로마 제국의 8분의 3을 소유한 영주''라는 위대한 칭호를 얻었다.[64]그의 명성은 후대에도 이어져, 19세기에 이탈리아 해군( Regia Marina|레지아 마리나it )은 그의 이름을 딴 강철 장갑함 엔리코 단돌로를 진수하기도 했다. 또한 영국의 시인 바이런 경은 그의 시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에서 단돌로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38]
4. 2. 부정적 평가
그의 애국심과 개인적인 야심은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 문명사적으로 큰 재앙이 발생했으며, 엔리코 단돌로는 이러한 파괴 행위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64]5. 대중문화
참조
[1]
문서
'Enrico Dandolo and the Rise of Venice'
[2]
서적
Enrico Dandolo and the Rise of Venice
[3]
서적
Enrico Dandolo and the Rise of Venice
[4]
서적
Enrico Dandolo and the Rise of Venice
[5]
서적
Venice and its Story
J.M. Dent and Sons, Ltd.
[6]
서적
Enrico Dandolo and the Rise of Ven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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